삼국시대 각국의 초기국가의 발전 과정을 정리해 볼까요?
삼국사회 각국의 초기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과정
안녕하세요.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이 어떻게 초기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 초기의 정치구조는 삼국이 성장해가면서 변모하게 되었다. 각 부의 자치력과 왕실의 통제력, 중앙정부의 집권력과 각 지역집단의 자치력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진전되어 간 삼국 전기의 대내적인 정치정세는 점차 왕권과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이는 철제 농기구의 개선과 광범위 한 보급, 수리사업, 우경의 보급 등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정복전쟁의 전개를 통한 사회분화의 진전으로, 각 집단의 자치력을 뒷받침하던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되어 갔고 모든 지역간 발전의 불균성이 완화되는 등의 당대사회의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일원적인 지배질서로 전환시켜 나가는 조직으로서 관등제와 관직체계가 확충되어 갔다. 삼국 초기 각 부는 자체의 관원 있었다. 이들은 같은 위계의 왕실 관원보다는 하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각 부가 분립하는 가운데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통합적인 상하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던 면을 나타내 준다. 그런데 이제 각 부의 자치력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왕권 하의 일원적인 관등체계에 흡수되었다. 각 부의 귀족들도 이 관등체와 신분제에 의해 편제되었다. 그 완성된 체계가 고구려의 14등 관등제, 신라의 17등 관등제, 백제의 16등 관등제였다.
나아가 관료조직이 확충되고 관직체계가 분화되어 갔다. 그 중 백제는 6좌평제와 22관부가 있어 세련된 면모를 보였으며, 신라에서는 6세기 초 이후 병부를 위시해 각종 관서가 확립되어 갔다.
이 관등체계의 실제적인 운영에서는 신분제에 의해 일정한 규정을 받았다. 출신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등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왕족과 몇몇 귀족집안이 최고의 신분층이 되었고, 그 하에 여러 귀족들이 몇 등급으로 나뉘어졌다. 신라의 골품제는 그 두드러진 예로서, 진골귀족이 주요 관서의 장을 독점하여 배타적인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한 피정복지역의 주요 거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성이나 촌 단위에 지방관을 파견해 중앙집권화를 도모해 나갔다. 몇 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된 행정촌이 기본적인 말단 행정단위가 되었으며, 다시 그러한 행정촌을 묶은 상위 행정단위가 설치되어 나갔다.
그러한 행정단위와 체계는 군사조직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백제의 담로제와 이어 사비시대의 방, 도, 성제에서 그러한 방향으로 진전되어 가는 면을 볼 수 있다. 신라에서도 주요 행정촌에 하급지방관인 도사가 파견되었고, 나아가 그 위에 군 설치되었다.
그리고 주요 지점에 군사령관으로 군주가 파견되었다. 고구려에서도 크고 작은 성을 단위로 한 지방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그 지방관은 욕살, 처려근지, 가라달 등으로 불려졌다. 신라에서는 각 지역의 지방 유력자들을 따로 관등체계로 편제해 그 실세에 따라 외위를 주었다.
이렇듯 삼국의 영역 내로 편입되어진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조직이 정비됨은 곧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중앙중부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중앙정부에 의한 영역 내의 주민에 대한 인두세의 부과와 노동력의 징발 및 빈부의 차등에 따른 호등제에 의한 조세의 부과가 행하여졌다. 각 읍락의 수장은 이제 국가권력을 집행하는 존재로서 지방지배조직의 말단에 예속되어졌다.
그러한 면은 중앙의 부에서 더 빨리 진행되었다. 부는 삼국 중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수도의 지역구획 단위든가 귀족들을 편재하는 행정상 구분단위와 같은 성격이 되었다. 이제 자치제적인 성격을 지닌 여러 집단들을 통합해 상하누층적으로 편제하였던 삼국초기의 정치구가 해체되고 중앙집군적인 영역국가체제로 변모해 갔다. 그에 따라 국가 권력의 기반이 되는 토지와 민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삼국 간 각축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이와 함께 강화된 국가권력을 매개로 지역 간의 연계성이 깊어졌고 농업 생산성의 향상은 토지소유의 지역 간 확대를 가져왔다. 그에 따라 삼국의 각국 영역 내에 포괄된 여러 종족 집단 간에 상호 교류와 융합이 진전되어, 점차 준 민족으로서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이 형성되었다.
한편으로는 삼국간 교류와 주민이주, 전쟁과 영역변동 등에 의해 삼국민 간의 그 존재 양태에서의 동질화도 진행되어 나갔다. 그러한 면은 삼국 말기까지 계속 진전되어 갔다.
이와같은 삼국사회 내에서의 변화의 진전은 당시 국제정세에 따른 삼국의 대외관계와 일정하게 연관된 면을 지녔다. 5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북중국의 유목민출신의 왕조인 북위, 남중국의 송-제-당으로 이어지는 한인왕조, 몽고고원의 유연, 동북아의 고구려 등의 주요국이 중심축이 된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주요 국가간의 역관계의 운동성에 의해, 어느 한 나라가 국제정세를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못하였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고구려는 북위, 유연 등과 장기간에 걸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북아지역에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5세기 고구려인들이 남긴 금석문에서 시조 주몽을 [천제지자], [일월지자]로 표현하여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등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개진하였던 것은 그러한 현실적인 상황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렇듯 이 시기에 중국이나 몽고방면으로부터의 어떠한 이질적인 외세의 침공이나 개입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 영토 내에 포괄되어진 다양한 지역과 잡다한 주민집단을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체제로 편제하여 융합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유효한 대외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한반도 내에서의 삼국 간 관계의 진전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몽고 방면으로부터의 정치적, 군사적인 압박이 배제된 상황에서 빈번한 사절단의 파견을 통해 삼국은 각기 자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외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갔고, 중국 및 서역방면의 선진문물은 삼국사회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였다.
이상으로 삼국시대 각국의 초기국가의 발전 양상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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