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고구려의 형성과 사회 모습을 알아볼까요?

초기 국가 시기의 고구려의 형성과 사회를 살펴볼까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안녕하세요. 초기 국가 시기의 고구려는 어떻게 사회가 형성되었을까요? 초기 고구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의 중앙집권 국가의 강한 고구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커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국가의 고구려는 작은 부족집단들이 조금씩 힘을 키워 다른 부족을 복속시키면서 인구규모와 재화가 축적되면서 왕이 생기고 국가가 생기면서 왕의 통치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의 형성과정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초기국가 시기인 고구려는 압록강 중앙 유역에 살고있던 맥족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압록강의 부근인 동가강과 독로강의 유역을 포함한 이 구역 맥족 사회에는 기원전 4~3세기 무렵 이후 철기문화가 보급되고 사회적인 격차가 점차 진전되어 갔습니다. 같은 혈족에 속한 여러 세대로 구성된 친족집단은 생산과 소비의 기본단위가 되었으며, 사회적 결집에서도 또한 친족집단이 기본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친족집단에는 혈연적이지 않는 관계의 세력이 약한 사람들이 예속민으로 흡수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한 강력한 친족 무리를 중심으로 일정한 산이나 강변 지역의 마을들을 규합한 지역적으로 규모가 있는 정치집단이 각 지역마다 생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있는 지역 집단 안에서 주도권을 가진 마을은 자연히 규모가 커져 큰 촌락, 즉 고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욋부세력에 대한 방어적 필요에 따라 촌락 뒷산에 성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큰 촌락을 다른 의미로 홀, , 구르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로 전해지는 단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고구려의 구려라는 명칭이 비롯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러한 여러 지역 집단 중에서, 큰 중심적인 집단을 지칭해 큰 고을 또는 높은 성이라 불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란 어원의 의미는 높을 고자에 촌락을 뜻하는 구려를 합한 높은 촌락, 높은 성을 의미한다고 여겨집니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기원전 2세기말까지에는 고구려라는 명칭의 실체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맥족사회 전체를 통괄하는 집권력을 지닌 정치조직체로서의 국가를 형성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씽씽의 지식블로그(www.jisikblog.com)이것은 고구려가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초기국가의 형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2세기 후반 위만조선의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그 뒤로 한나라 군사이 침략해 와서 기원전 107년 현토군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현토군안에서의 여러 현 중에 고구려현의 존재가 보입니다.
 
드라마로 보는 고구려의 의복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는 곧이어 고구려인의 불만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기원전 75년 현토군이 요동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현토군을 한반도 지역에서 몰아낸 뒤 맥족의 여러 지역 집단들은 소노부의 우두머리를 고구려 왕으로 한 연맹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연맹체에서 고구려 왕의 통치권력은 강하지 못하였고, 각 지역 집단들은 자치적인 본인 세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소국이나 부족과 같은 특성을 가진 각 지역 집단들은 그들 집단 내에서 유지되고 있는 공동체적 관계에 의해,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맥족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강력한 통합 세력의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한 한군현의 분열 정책에 의해, 얼마 동안 통합되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각 지역 집단들 간의 서로 경쟁 또한 진행되어 갔습니다. 많은 나(지역집단)들이 점차 흡수되어 다섯 나(지역집단을 의미)를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어 그 중 오늘날의 길림시 지역에 중심을 두고 있었던 부여에서 상대적으로 늦게 이주해 와 세력을 강화한 계루부 집단이 소노부 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고구려에서 지역집단을 나 라고 부릅니다. 

한편 계루부 집단의 귀족들은 다섯 나 이외의 인근 다른 종족들에 대한 정복전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그들은 피정복민으로부터 공납을 거둬들이고 노비와 재물를 축적시켜 나갔으며, 계루부의 일반민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여 그 계급적 토대를 강화하여 나갔습니다

나아가 이들 계루부 집단의 귀족들을 대표한 계루부 왕실이 다른 네 집단의 독자기반을 억압하는 강한 통치력을 구축하고, 고구려 전체부족을 통합하는 고대국가가 기원후 1세기 무렵에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국내적인 통합 과정은 크게 보면 고구려 사회에 퍼져있던 한군현 세력의 지배력을 배제하는 과정이었으며 그 성과였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요동, 낙랑방면의 한나라 군현에 대한 조직적인 전투를 펼쳐 나갔고, 옥저와 동예의 읍락들을 점령시켜 나갔습니다.
 
고구려의 발전


국외적인 팽창은 노획품과 전쟁포로, 노예 및 공납 등의 물질적인 부의 증대를 가져왔고, 이는 5부내의 사회적 분화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관계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씽씽의 지식블로그(www.jisikblog.com)이러한 변화는 왕위 계승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초기에는 형제 계승이었던 것이 2세기말 이후 부자 계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변화를 보면 혼인 풍습에서도 친족 집단의 공동체적 관계에 바탕을 두고 행해졌던, 형이 죽으면 전쟁에서 죽으면 동생이 형의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취수혼이 소멸되어 갔습니다

이에 부와 지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러지는 베타적인 부자상속제도가 점차 확립되어 갔고, 부인의 정절이 요구되어졌으며, 집단가족이 아닌 단혼가족이 생산과 소비의 기본적인 단위가 되어 가는 추세를 나타내었습니다. 그에 따라 군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새로운 윤리관을 담은 이념이 수용되어질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 갔습니다.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은 무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공에 따른 타격과 같은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지속되어 4세기 초 낙랑군을 병합하고 마침내 5세기에는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넓은 판도를 차지하는 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상으로 초기 국가인 고구려의 형성과 사회모습을 대외적, 대내적인 모습으로 살펴보았습니다.다음 포스팅은 백제의 초기 모습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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