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볼까요?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 정리
안녕하세요.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과정과 신라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삼국 통일 전쟁 시 고구려, 백제의 상황
5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구려는 6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531년 안장왕이 피살되고, 이어 안원왕이 말년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귀족 간의 내분이 크게 폭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귀족 간의 내분은 강력한 일원적 집권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병집단을 거느린 귀족들이 상호 타협하여 실력자의 직책인 대대로를 선임하는 귀족연립정권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나중에 강력한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던 연개소문 일파의 세력도 근본적으로는 이 체제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551년에 바로 이러한 내분을 틈타서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고구려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서쪽에서는 북제, 유연을 격파한 돌궐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고구려는 내분 수습과 신라와의 밀약을 바탕으로 일단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을 극복한 뒤, 다시 남쪽으로 예봉을 돌려 한강유역을 회복하려고 기도함으로써 신라와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후 삼국 사이에는 치열한 상쟁이 전개되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 과정 - 고구려,백제와 전쟁
한편 백제는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수복하였으나 2년 뒤에 신라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신라에 보복원정을 시도하였지만 자신이 관산성에서 전사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에 열중하게 되었으니, 특히 의자왕이 즉위한 뒤로는 더욱 격렬해져 대야성 등 40여 성을 탈취하고,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당 교통로를 끊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빈번한 공격은 오히려 대외적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초래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국력의 피폐와 경제적 파탄을 가져옴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고립에 빠진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경를 시도하였고 마침내 두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통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통일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고립에 빠진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경를 시도하였고 마침내 두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통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통일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었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는 이미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여서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또 이듬해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고구려가 이를 방어하였으나 자체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양국의 멸망은 각기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백제지역에서 복신, 도침, 흑치상지 및 왕자 풍 등이 활약하였고, 고구려지역에서는 건모잠, 안승 등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은 오래가지 못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둘째 단계는 신라와 당과의 전쟁이었다. 일찍이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적어도 평양 이남의 땅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밀약을 맺었으나, 당나라가 마침내 삼국 전체를 수중에 넣으려는 의도를 내보이자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고구려유민을 포섭하여 함께 당나라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현재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차지하여 676년에 불완전하나마 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 3가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삼국통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어 민족굮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통일전쟁이 외세인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삼국통일이 불완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이 중 특히 뒤의 두가지는 삼국통일의 한계성으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심지어는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고 고려에 의한 통일이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한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의의를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한계성은 전자의 경우 당에 대한 거족적 대항으로서, 후자의 경우 발해의 건국과 고려의 통일로서 보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 말기부터 벌어졌던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은 상대국에 대한 대결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미미하나마 그들 사이에 동일역사체 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삼국 말기부터 벌어졌던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은 상대국에 대한 대결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미미하나마 그들 사이에 동일역사체 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전부터 중국이 삼국을 삼한으로 불렀던 것은 이러한 삼국의 동질성을 염두해 두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삼국 사이의 대결이 약화되면서 반대로 동질의식이 뚜렷이 형성되는 것은 668년 이후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면서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내적으로 백제, 고구려유민들을 결속하고 나아가 귀족세력을 억압하여 전제왕권을 정정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이루어, 삼국의 영역과 주민을 아울러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룩하려 하였던 것이다.
685년 신라는 정주를 마지막으로 삼국지역에 각기 3개 주씩 전국을 9주로 편제하였으니 이것은 삼국을 통합하여 단일국가로 만들었다는 통일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며, 687년 왕의 직속부대로서 삼국민과 말갈인으로 9서당을 창설한 것과 9주의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재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685년 신라는 정주를 마지막으로 삼국지역에 각기 3개 주씩 전국을 9주로 편제하였으니 이것은 삼국을 통합하여 단일국가로 만들었다는 통일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며, 687년 왕의 직속부대로서 삼국민과 말갈인으로 9서당을 창설한 것과 9주의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재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신라인들의 삼국통일에 대한 자의식도 고양되어 686년에 세워진 청주 운천동 사적비와 692년 신라가 당에 보낸 글 등에서 신라인들의 삼국통일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통일체의식은 삼국민들의 동질화에 진전을 가져오게 하였으나, 아직은 그 의식 속에 분립의식도 내재되어 있었으니 중앙집권력이 와해되는 단계에서는 이 의식이 표출되곤 하였다.
이러한 통일체의식은 삼국민들의 동질화에 진전을 가져오게 하였으나, 아직은 그 의식 속에 분립의식도 내재되어 있었으니 중앙집권력이 와해되는 단계에서는 이 의식이 표출되곤 하였다.
후삼국의 정립에 이르러 견훤이 백제 계승의식을 이용하였고, 최치원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출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 고려 중기에 이르러 묘청 일파와 김부식 일파도 각기 고구려와 신라 계승의식을 내세워 그러한 분립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분립 의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30여 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과정에서 새로운 역사의식이 형성됨으로써 불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한국사의 상한이 확장되어 삼국의 동일기원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고조선에 대해 뚜렸한 인식을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의로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과정과 역사적 의의 3가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관하여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학자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릅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기 때문에 삼국통일 과정 위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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