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후기 정세 변동 흐름을 정리해 볼까요?(삼국통일 이전 상황 정리)

6세기 이후 삼국 후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는 어떻게 변할까?

 

안녕하세요. 6세기 이후 한국사에 중요한 변화가 오게 됩니다. 바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통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당의 도움을 받아 불완전한 통일을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그냥 망하지 않습니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삼국이 어떻게 싸우며 삼국통일을 직전까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세기 이후 삼국시대 정세 변화
6세기 이후 삼국시대의 정세

6세기 후반에 들어서 삼국간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은 대륙의 정세변동과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략하여, 하류지역은 백제가 그리고 상류지역은 신라가 차지하면서 고구려가 남방의 요새로 삼았던 한강유역을 상실하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545년에 있었던 양원왕 즉위를 둘러싼 귀족 간의 분쟁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어 고구려는 북중국의 북제의 압력과 그리고 유연을 격파하고 등장한 몽고 고원의 신흥 유목민 국가인 돌궐의 적극적인 공세에 직면하게 되면서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이러한 안팍의 위기를 맞아, 고구려 귀족들은 대내적으로는 그들 간의 분쟁을 수습하고 귀족연립정권 체제를 취하였습니다. 이는 각기 사병을 거느린 귀족들이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를 그들 사이에서 3년마다 선임하는 형태로서, 이후 고구려 말기까지 기본적으로 이러한 귀족과두체제가 유지되었습니다. 귀족세력들이 각자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합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내분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밀약을 맺어 남부 국경선에 안정을 취한 뒤, 서북부방면의 위험에 대처하는 데 주력하는 방책을 취하였습니다. 신라와의 밀약내용은 대체로 한강유역과 동해안의 함흥평야일대의 영유권을 신라에 양도하고 양국이 화평한다는 것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남쪽의 요충지인 한각유역을 빼앗긴 것이 고구려로서는 뼈아팠지만 대내외적으로 나라가 혼란하여 신라를 공격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신라와 화평을 위해 한강유역을 포기합니다.


이에 신라는 553년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기습해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백제군과 대가야군 및 1천 명의 왜군을 포함한 3만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대패하여 전사하였습니다. 백제 성왕의 전사 이후 백제는 기세가 한풀 꺾여서 신라와의 싸움을 중단합니다.

6세기 이후 삼국시대 정세 변화2
6세기 이후 삼국시대 정세 변화2


이후 곧 이어 대가야는 신라에 병탄되었고 이제 신라는 소백산에 이동지역과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차지하고, 종래의 수세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 간에는 상쟁이 지속되었다. 6세게 중반 고구려가 돌궐의 공세를 저지한 수 재차 남으로 에봉을 돌림으로써, 신라와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에 삼국 간의 관계는 각각 상쟁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 모두 힘이 빠졌기 때문에 전쟁은 하고 있지만 큰 전쟁이 아닌 조그마한 국지전 양상을 보이며 서로를 압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삼국간의 상쟁은 결정적으로 어느 한 나라가 정세를 압도하는 상황으로까지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대륙의 정세에서도 신흥 돌궐의 팽창이 기존 국제관계에 충격을 주었으나 결정적인 변동을 야기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삼국 간에는 상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장기간의 전쟁상태는 사회분화를 더욱 촉진하였습니다. 565년 대가야 정벌전에서 공을 세운 소년 화랑 사다함에게 300명의 포로와 토지가 주어졌음에서 보듯이, 귀족들은 전쟁을 통해 많은 토지와 노비 및 재화를 집적하였습니다. 전쟁을 통해 귀족들은 부를 축적하면서 오히려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소농민층의 일부는 몰락해 갔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번번히 동원되었다. 급박한 군사정세에 정세에 따라 때로는 노약자도 징발되기도 하였으며, 원정기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들이 수시로 발발하더보니 시시때때로 농민들은 징병되었습니다.

소년 가실과 설시녀 사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당시 전란의 와중에 있었던 일반민의 애환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 둘은 평상시에도 군역과 노역에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여 소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나라가 황페화가 되자 백성들은 농사일을 못해서 고리대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후 고리대로 농민들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며 나라의 기반을 상실하게 됩니다.


한편 삼국의 영역국가체제가 진전되고 사회분화가 촉진됨에 따라, 지역 간 주민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지방 유력가들이나 몰락한 일부 농민이 늘어난 병력수요와 신속한 동원력의 필요에 의해 행해진 모병에 응하기도 하였으며, 귀족의 문하에 의탁하여 입신을 도모하였습니다. 유력한 귀족들은 정치적, 군사적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이들을 흡수하기도 하였습니다.


7세기 중반 당나라의 동쪽으로의 침공이 예상되고, 삼국 간의 상쟁이 가열화되자, 위기의식과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삼국의 귀족들 간에도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 갈등이 고조되었습다. 귀족들간의 갈등의 원인은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전쟁의 관점때문입니다. 강경파의 대표가 연개소문입니다. 


삼국의 귀족들간에도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마침내 642년 고구려에서는 대외강경노선을 취하였던 연개소문이 무력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엿으며, 신라계열이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백제의 의자왕도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엿습니다. 심국 모두 집권력과 동원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모두 전쟁이 끝에 달했다는 것을 서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면서 서로를 감시합니다.


한편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6게기말 중국에서 수나라가 등장함에 따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수나라는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고, 몽고고원의 돌궐을 격파, 복속시킨 뒤 고구려에 대하 침공을 감행하여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육군, 수군 양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우리에 잘 알려진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가 발생합니다.


수의 기도는 고구려에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고,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가 주요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당나라도 수와 같은 방향과 과정을 거쳐 동방으로의 침공을 도모하였습니다

대륙에서 전개된 새로운 정세변동의 물결과 한반도 내에서 전개되어 오던 삼국 간 상쟁의 파장이 고구려를 사이에 두고 따로따로 전개되던 것이 점차 상호 연결되어 갔다. 특히 당의 제1차 고구려 침공이 패배로 끝난 뒤, 신라의 새로운 집권세력과 당이 급속히 군사동맹을 강화함에 따라, 삼국통일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게 됩니다.

6세기 이후 삼국시대 정세 변화3
6세기 이후 삼국시대의 정세


이상으로 한국사 6세기 이후 삼국시대의 정치 변동과 정세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국사를 공부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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